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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정조 - 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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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2대 왕 정조 정조는 장헌(사도)세자(훗날 장조로 추존)와 혜경궁 홍씨(훗날 경의왕후로 추존)의 둘째 아들로, 1752년(영조 28) 9월 22일 창덕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1759년(영조 35) 8세의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왕위에 오른 정조는 재위 24년 동안 탕평책을 실시하여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고, 규장각을 두어 학문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수원에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성을 쌓았다.  무엇보다 지극한 효심은 백성들에게까지 추앙을 받았다.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을 두른 차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융릉의 상설과 흡사하다. 8각 장명등도 융릉과 같다.  문석인과 무석인의 조각은 매우 사실적이며, 무석인은 금관조복을 입고 있다.  19세기 왕릉 석물 제도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융릉과 건릉은 정조 때의 문운이 융성하던 기운과 양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49세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융릉 동쪽의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풍수지리상 좋지 않으므로 길지를 찾아 천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 물색하던 중에 1821년(순조 21) 3월 9일 정조의 비 효의왕후 김씨가 승하하였다.  따라서 1821년(순조 21) 정조의 능을 현 위치인 현륭원 서쪽 언덕에 이장하여 효의왕후와 합장해서 오늘날의 건릉이 되었다.   참고 ;  http://royaltombs.cha.go.kr/ 융건릉홈페이지 ;  http://hwaseong.cha.go.kr/n_hwaseong/index.html  정조왕릉인 건릉은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합니다. . 크게 보기 . 2014년 기대되는 영화 역린의 주인공. 정조의 왕릉인 건을을 탐방해보기로 합니다. 융건릉의 입구의 표지입니다. 융릉은 정조의 아버지

캠핑장 답사 - 산음부녀회 산음 유원지[201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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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간후 캠핑기록이 많이 밀렸습니다. 부지런히 적어야 겠습니다. 2013년 여름의 마지막에 방문한 기록을 적습니다. . 크게 보기 . 네비게이션은 소리산1교를 찍고 가면 편리합니다. 지도에서 소리산1교를 찾아서 가봅니다. 다리를 건너면 여름에는 이렇게 크게 표지판이 있습니다. 그 좌측에는 수봉농원이라는 바위에 새겨진 글이 있습니다. 수봉농원 바위와 산음유원지 입간판 사잇길로 들어갑니다. 작은 자리를 하나 더 건너야 합니다. 좌측으로 물놀이 하는 인파가 인산인해입니다. 이사진을 찍은때가 여름의 막바지 였으니까요. 이정도의 계곡이 흐릅니다. 물놀이하기는 괜찮은 수준입니다. 들어가지 마자 우측에 이렇게 두개의 동으로 이루어진 화장실이 있습니다. 좌측의 나무 뒤편이 야영이 가능한곳이면서 계곡쪽입니다. 우측은 주차장인데 자리가 꽉찼습니다. 여름성수기가 아니라면 우측의 주차장에도 큰 텐트들도 칠수 있겠습니다. 바닥은 흙바닥. 계곡쪽으로 텐트친 많은 인파입니다. 여름철에는 하루에 1만원입니다 전기는 불가, 요 위쪽에 설거지 할수 있는 수도꼭지가 두개 있습니다.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풍경입니다. 좌측은 여전히 계곡, 우측은 천막을 쳐두었습니다. 1박을 하지 않고 물놀이만 하고 간다해도 소액의 요금을 징수합니다. 성수기가 지난 계절에 가면 나름 오지필이 느껴지는 야영장입니다.

21대 영조 - 원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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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1대 왕 영조 영조는 숙종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이다. 1699년(숙종 25) 6세 때 연잉군에 봉해지고, 경종이 즉위한 1721년에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1724년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정쟁 속에 즉위한 영조는 균형 있는 인재 등용을 통하여 탕평세력을 구축하였다.  또한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1762년(영조 38)에는 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과도한 경계심으로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였다.  1776년(영조 52) 3월 5일 춘추 83세로 경희궁 집경당에서 승하하였다.   원릉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만 이어져 있는 쌍릉이며, 각 봉분 앞에 혼유석이 놓여 있다.  문무석인 공간은 중계와 하계를 통합하고 등급을 두지 않았다. 장명등은 사각등 형식이고, 망주석의 세호가 동물 형상으로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오른쪽의 것은 위로 향하고, 왼쪽의 것은 아래로 향한다.  문무석인은 대체로 어깨가 좁고 세장한 형태이며, 장중함 보다는 곱고 섬세한 느낌이다.   1776년(정조 즉위) 3월 5일 영조가 승하하였다.  영조는 원비 정성왕후가 잠든 서오릉의 홍릉을 자신의 자리로 정해 쌍릉으로 조영하기를 바랐으나, 손자인 정조는 영조가 승하한 그 해 7월 27일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에 그를 안장하고 원릉이라고 했다.  원릉을 조성한지 29년이 지난 1805년(순조 5)에는 61세의 나이로 승하한 영조 계비 정순왕후 김씨를 원릉의 옆에 모셨다.   참고 ;  http://royaltombs.cha.go.kr/ 동구릉홈페이지 ;  http://donggu.cha.go.kr/n_donggu/index.html  영조왕릉인 원릉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내에 위치합니다. . 크게 보기  조선시대에 왕중에서 가장 장수한 왕중 한분이신 영조의 왕릉.

20대 경종 - 의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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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0대 왕 경종 경종은 1688년(숙종 14) 10월 27일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희빈 장씨이다.  숙종은 세 명의 왕비가 있었으나 그들에게서 아들이 없어 1690년(숙종 16) 당시 3세였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어머니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모함한 사실이 밝혀져 사약을 받는 등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으며, 선천적으로 병약하였다.  1720년 33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재위 4년 만에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기지 못하고 승하하였다. 의릉은 20대 왕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의 능으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한 언덕에 앞뒤로 나란히 배치한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능이다. 위쪽에 있는 경종의 능침에만 곡장을 둘렀고, 왕릉과 왕후릉 모두 혼유석을 비롯한 대부분의 석물은 별도로 배치하였다.  이러한 배치 양식은 능혈의 폭이 좁아 왕성한 생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지리적 이유이며 자연의 지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능원을 조성하려는 우리 민족만의 자연관을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왕릉과 왕후릉의 봉분에 모두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을 설치하였으며, 작고 검소한 규모의 석물을 배치하였다.  1724년(경종 4) 8월 25일 경종이 창경궁 환취정에서 승하하자 같은 해 12월 16일 양주 중량포의 천장산 기슭 언덕에 예장하고 능의 이름을 의릉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6년 후 1730년(영조 6) 6월 29일 경덕궁 어조당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계비 선의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10월 19일 경종 왕릉 아래에 능을 조영하였다.   참고 ;  http://royaltombs.cha.go.kr/ 의릉홈페이지 ;  http://eureung.cha.go.kr/n_eureung/index.html  경종왕릉인 의릉은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에 위치합니다. . 크게 보기 . 경종왕릉인 의릉에 방문하기로 합니다.